봄날 피어난 꽃, 하춘화. 우리나라 신민요와 대중가요의 장르를 넘나들며 모두 소화가 가능했던 실력파 가수인 이화자-황금심-박재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인물. 현재 52세, 가수 활동은 어느덧 46년째.
그럼에도 데뷔 당시 상황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부친 하종오(87)씨가 지난 46년간 관련자료를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덕택이다. 일기쓰기는 물론, 스크랩 자료만도 자그마치 22권 분량이다. 이 기록은 개인사를 뛰어넘어 어느덧 우리 가요사의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하춘화씨와 부친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들이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한 것은 처음이라고.1961년 12월3일에 첫 취입한 데뷔앨범은 당시 최연소 독집음반으로 화제를 모았다.1963년 4월1일,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 최연소 정회원이 된다.
“제가 하춘화예요. 금년에 일곱살입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그의 첫 데뷔음반.“노래란 것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이 어린 제가 여러분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퍽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한번 불러 보겠어요.” 라는 앙증스러운 멘트가 이어진다. 이 독집음반엔 ‘효녀 심청 되오리다’를 비롯해 여덟 곡의 노래가 수록됐다. 모두 오종하 작사, 형석기 작곡의 노래다.
작곡가 형석기씨는 ‘대한팔경’ ‘맹꽁이 타령’의 유명 작곡가. 작사자 오종하는 바로 부친 하종오씨로 이른바 ‘로꾸거 이름표기’인 셈.
“그 노래들의 작사자 표기가 제 이름을 거꾸로 표기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다만 당시 춘화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사랑타령 같은 걸 부르게 할 .수 없어 직접 가사를 손질했다는 기억만이 어렴풋할 뿐…. 아마도 작곡가 형석기씨의 제안이었을 것 같군요.” 부친의 회고다.
이 음반에 담긴 노래는 그밖에도 ‘비개인 서울거리’ ‘부산항 블루스’ ‘대구역 떠나는 완행열차’ ‘목포항 탱고’ 등으로 어린 춘화양은 노래로 전국 팔도를 순회한다. 마치 이후 전국을 누비며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군림, 개인 최다 공연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것임을 예고하듯.
실제로 1991년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 공연기록은 1260회. 현재도 1년에 30∼40차례 콘서트와 디너쇼를 갖는다.
“당시엔 악보는 물론 글씨조차 읽지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모두 외워서 했어요.”라고 말하는 하종오씨. 편집 없이 한번에 녹음해야 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신동’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춘화’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노래는 1965년에 발표한 ‘아빠는 마도로스’. 불과 열살 때였다. 아울러 이 무렵 개봉된 영화 ‘아빠 돌아와요(임원직 감독)’에서 주연을 맡았고 주제가까지 취입했다. 서울수송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1971년 ‘물새 한 마리’, 이어 작곡가 겸 가수 고봉산씨와 함께 ‘영감타령’을 새롭게 편곡해 발표한 ‘잘했군 잘했어’로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녀 나이 불과 열여섯살, 일신여상 2학년 때였다.
이때 하춘화는 정상의 가수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당시 엄격히 적용되던 ‘귀밑머리 1㎝’라는 교내 규정에서도 열외 되었을 정도로 특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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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하춘화씨는 1955년 6월28일,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철강선 제조업체 동아제강의 설립자였던 부친 하종오씨는 한때 야당 정치에 몸담았다가 5·16 이후 서울로 무대를 옮긴다. 그때서야 둘째딸 춘화양의 노래솜씨가 주위에 소문이 나 ‘신동’이었음을 알게 된 부친은 가수 고복수씨가 운영하던 동화음악예술학원에 등록, 본격적인 노래공부를 시킨다.
“춘화는 유년시절부터 놀랍게도 일본 노래, 특히 미소라 히바리 노래까지 곧잘 따라 불렀어요. 동화예술학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숙소가 있던 청진동 여관에서부터 명동의 학원까지 걸어다니면서도 단 한차례 거른 적이 없었을 만큼 매우 열정적이었지요.”
첫 독집음반을 발표하던 1961년 12월, 공교롭게도 ‘아동복리법’이 공포된다. 때문에 음반발표 가수로서 한국연예협회가 발급하는 ‘가수증´을 취득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만 14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곡예를 시킬 수 없다.’는 아동복리법 조항 때문. 부친은 ‘노래활동과 곡예는 엄연히 다른 분야’라는 청원서를 내고 결국 정회원 가수증이 발급됐다.
아울러 ‘단발머리 시대’에 초·중·고 시절을 보내며 학업과 무대를 동시에 병행했던 하춘화. 헤어스타일만큼은 늘 한결같이 ‘긴 머리’였다. 이 또한 부친의 의지였다. 그런 덕분에 하춘화의 연예활동은 가속도를 내며 ‘물새 한 마리’ ‘잘했군 잘했어’에 이어 1972년 예그린의 뮤지컬 ‘우리 여기 있다’와 영화 ‘세노야 세노야’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재능을 선보였다. 이어 ‘연포 아가씨’ ‘영암 아리랑’ ‘하동포구 아가씨’ 등 지방 소재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펼쳐진 전국 순회 ‘하춘화 리사이틀쇼’는 항상 만원사례. 아울러 TBC,MBC 10대 가수상을 연속 7년과 8년동안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부친은 주변의 시각에 대해 점차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연예활동은 학업 소홀로 이어지는, 이른바 ‘10대 소녀가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이었다. 때문에 부친은 누구보다도 엄하게 부족한 학업과 인성에 대한 교육을 하춘화씨에게 강조했다.
이 덕분일까. 하춘화는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는 가수 중 한명이다. 1972년부터 취로사업장용 손수레와 새마을공장 등에 재봉틀을 기증한 것으로 시작된 그녀의 선행은 그동안 각 단체로부터 120여차례 감사패를 받았을 정도다. 현재 국내 연예인 중 최다 봉사활동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심지어 지난 2001년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에서 1억 5000만원의 수익금 전체를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돕기 성금으로 기증했다. 그해 정부로부터 옥관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데뷔 45주년 공연에서도 개런티를 포함해 수익금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던 미담을 남겼다.
이같은 하춘화의 46년간 일거수일투족 기록을 메모해온 부친은 이를 단행본으로 발간할 예정이어서 새로운 가요비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